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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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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소개

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 안정미와 수려함이 넘치는 고려시대 탑, 광주서오층석탑(光州西五層石塔) *광주공원 안에 거북머리와 같이 돌출된 지형 위에 세워져 있다. 탑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전체적인 상태는 매우 양호한데, 통일신라시대의 이중기단 양식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탑의 오층 몸체부 중 초층을 다섯 개의 돌로 짜맞춘 것이 다른 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며, 지붕돌의 추녀와 몸체부의 알맞은 비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드는 각층의 비율이 크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게 보이면서도 튼튼한 안정미와 수려함이 넘치는 고려 시대 탑으로서, 뛰어난 수작이라 할 수 있다.  * 고려시대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는 탑의 구조 *광주서오층석탑의 기단부는 통일신라 시대의 탑이 대체로 2층기단으로 되어있는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 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단층으로 간략화되고 있다.  탑신부는 1층의 옥신석만 빼고 각층마다 옥신석과 옥신석이 모두 한 개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각층의 체감률이 적어 탑의 인상이 날렵하고도 높게 보인다. 1층 옥신석은 2단의 별석으로 짰는데 하단은 4매의 돌을 깎아 맞추었고 상단은 한 개의 돌을 다듬어 만든 이형탑이다. 이런 형식은 고려시대의 탑에서만 볼 수 있다.  옥개석은 추녀가 넓은 편이며 추녀 네 귀의 위아래가 모두 뒤쪽으로 되바라지도록 전각을 주고 있고, 층받침은 고려탑의 정형대로 모두 4매이다. 옥개석은 받침마다 모서리에서 10㎝씩의 턱을 주어 체감에 균형미를 주고 있다. 2층 옥신석도 옥개석과 마찬가지로 1층 옥신보다 높이가 현저하게 줄고 있다. 탑신 위에 있었던 상륜부는 모두 상실되었다. 이 탑은 1961년에 해체, 보수했는데, 이때 2층 옥신석의 위쪽에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그 속에서 원형이 잘보존된 금동전각형 사리 장엄구를 찾아냈다. 이 사리구는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탑과 관련되 전설 *탑이 있는 곳은 원래 성거산 또는 성구강이라 불리웠으며, 산의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다고 전해진다. 거북이 광주를 이롭게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라 생각하여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꼬리 부분인 현향교 위치에 성거사를 지을 때 완성 단계에서 무너지곤 했는데, 도승의 말을 듣고 거북의 목 위치에 오층 석탑을 세운후로 절이 허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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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특징

이곳은 20대, 3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진월동 전라도이야기, 미쓰램주월점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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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희가옥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옛 집터를 그 후손들이 여러차례 고쳐지은 집이다. 이 집은후손들이 여러 차례 고쳐 지은 집으로 현존 가옥은 1917년 건축한 것이다. 예전에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현재는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대문등이 남아있다. 대문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이다. 사랑채는 정면 네칸 측면 한칸으로 앞뒤로 마루가 있는 팔작 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두벌대 기단위에 덤병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평면은 좌로부터 한칸의 방 3개와 한칸의 대청을 1단 높혀 누(樓)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여섯칸, 측면 한칸에 전후좌우에 마루가 있는 팔작 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외벌대 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앞열은 원형 그 외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원형 기둥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내부가구는 고주위에 대량을 걸치고 판대공을 놓았으며 구 위에 종도리를 놓았다. 평면은 좌로부터 한칸반의 부엌, 두칸의 대청, 한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창호는 전체가 양쪽으로 열어지는 문이며, 방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넉살창이 있다. 숭정기원후오갑정사윤이월초구일(崇禎紀元後五甲丁巳閏二月初九日)이라는 상량문에 글씨가 쓰여 있는데 이것으로 건립연대가 1917년임을 알수 있다. 사당은 고경명장군과 그 아들 종후, 인후 형제의 부조묘이다. 이 사당은 정면 세칸 측면 한칸으로 앞에만 마루가 있으며 맞배지붕이다. 외별대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현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첨자형의 포로 결합하였고, 초익공 위에는 용두를 빼내고 장혀와 굴도리를 얹었다. 내부가구는 대량위에 동자주를 얹고 종보를 걸친 뒤 그 위에 다시 판대공을 놓았으며, 겹처마에 조잡한 모조 단청을 하고 있다. 건립연대는 안채보다 빠른 시기로 추측된다.
전통적인 한국적인 고풍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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