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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리성지라 불리우는, 왕궁리유적 *1998년 9월 17일 사적 제408호로 지정된 유적으로 면적은 21만 6,862㎡에 이른다.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르며 마한·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발굴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특히, 탑을 에워싼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 유물을 찾았다. 성곽의 모습은 현재 발굴을 통해 점점 드러나고 있다. 또한 성곽 안팎으로 폭이 약 1m 정도로 평평한 돌을 깔아 만든 시설이 발견되어 성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 왕궁리유적, 백제사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 *왕궁리유적은 인접한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 유적으로 꼽힌다. 크기를 떠나 왕궁리유적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왕궁리유적터가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과 백제 후기 익산 천도설 등의 역사적 가설에 뒷받침이 되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학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의 문헌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곳이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와 왕궁리유적의 발굴로 익산 왕도설이 힘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 등은 아직까지 백제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왕궁리유적전시관]왕궁리유적전시관은 왕궁리5층석탑이 위치한 왕궁리유적 남측에 건립되어 2008년 개관한 전시관으로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내용을 소개하고 출토유물을 전시하여 문화교육장으로 활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20년 동안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경영되다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전시관에서는 왕궁리유적의 발굴조사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하고 중요 출토유물을 전시하여 왕궁리유적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고 백제기와를 관람객이 직접 만져보면서 기와 제작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목판찍기 체험도 준비되어 있다.백제 왕궁터는 우리나라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함께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건물지를 비롯한 14개의 백제 건물지와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화장실 유적 등이 조사되어 왕궁의 축조 과정과 왕궁에서의 생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유물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중 300여 점을 선정·전시하였는데, 왕궁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금제품, 유리제품, 수부(首府)명 인장와, 전달린토기 등과 함께 연화문 수막새, 각종 인장와와 토기류, 금과 유리제품을 생산하던 도가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개관일 : 2008년 12월 23일
더보기이곳은 20대, 4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유적지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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