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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는 고려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창건하였고,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다시 지었으며, 조선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이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으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 이후 성종3년(1472)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를 시켜 중창 시켰으나, 당시 억불숭유정책이 심화되면서부터 회암사는 여러 차례 유생의 상소와 함께 특히 명종 때 불교를 중흥하려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보우대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이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후 보우대사가 유배지에서 피살되고 덩달아 회암사 승려까지 미움을 받게 되니 200여년 동안 번성하던 회암사는 빈 집이 되어 버렸다. 이 때부터 점차 퇴폐해지기 시작하여 어느 때인지 모르게 풍상과 함께 회암사는 인멸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번성기 때 회암사의 규모는 전각이 총 262간이었고, 암자도 17개나 되었으며 또한, 모셔진 불상도 15척짜리가 7구나 있었다고 하며, 관음상도 10척이나 되어 당시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기가 동국 제일로서 이런 절은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운허요하가 쓴 "천보산 회암사 대웅전 창건기"에 의하면 1828년에 탑비를 다시 세우면서 조그만 암자를 지어 가람을 수호하고, 옛 회암사를 잇게 했으며, 1922년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대사가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어 오늘의 회암사에 이르게 되었다.후설에 의하면 회암사의 폐사는 빈대가 많아 불을 태워 없앤 절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소실됐다는 설도 있고 또한 절의 크기에 대해서 가마솥 안에 들어가 팥죽을 쑬 만큼 절의 규모가 컸다고 하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쌀을 씻는 함지박이 너무 커 사람이 빠져 죽어도 모를 정도였으며, 전국을 다니다가 만나는 승려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회암사에서 왔다고 할 만큼 승려 수가 많았다"고 한다. 옛 회암사는 문헌상 동방의 첫째였고 우리나라의 국찰이었으나 폐허가 된 후 사지에 석벽과 기단, 계체 등 일부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고 있으며, 앞으로 사적지내 사유지를 매입하고 원형 그대로 발굴한 후 문화와 역사적 가치창출로 지역의 전통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있다. * 문화재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 387호), 회암사지 부도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 멧돌 (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9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0호), 무학대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 부도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2호), 회암사지 당간지주 (향토유적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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