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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은 현재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사적 제 257호의 문화유산이다. 운현궁은 경복궁과 같은 궁궐이 아니라 왕족의 친족들이 거주하던 곳을 궁(宮)으로 부른 것 중의 하나이다. 궁(宮)은 생활의 공간이며 궐(闕)은 정치의 공간으로서 경복궁이 정치와 궁중생활이 함께 이루어진 곳이었다면, 운현궁은 왕족의 친족인 흥선대원군의 일가가 거주하고 생활하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운현궁은 조선조 말기의 역사적 사건들 대부분이 시작된 곳이며 수많은 개혁정책과 쇄국정책이 시행된 곳이었기에 그 역사적 상징성은 남다르다고 하겠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였으며,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 즉 임금이 되기 전까지 출생, 성장한 곳이었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대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이 때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는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지고 흥선군의 사저는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운현궁의 신증축 공사는 고종이 즉위한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시작되었고, 9개월만에 노안당과 노락당의 준공을 보았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대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대, 구 TBC방속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전해진다. 운현궁의 대표적인 건물은 고종 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안당과 노락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때 주로 이용되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유폐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말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 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이로당은 노락당 옆에 있는 안채로서 구조가 "口"자형으로 되어 있고 그 내부 가운데에 정원이 있는 철저한 금남의 구역이었다. 노락당 못지 않게 운현궁의 절대적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謹門), 공근문(恭勤門) 등이 있었으며,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터에 경근문의 기초만 남아있다. 운현궁의 규모와 구조가 이와 같이 웅장하고 화려했던 것은 대원군이 권좌에 있을 때 뿐이었다. 그가 하야한 후 고종 18년(1882), 청의 정부에 피납되어 있는 3년여 동안 운현궁의 재정은 매우 궁핍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운현궁의 위용도 퇴락해졌으며 대원군이 타계한 다음은 그 유지관리가 매우 어려워졌다.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1845~1912)이 관리할 때, 고종이 내탕금 270만냥과 쌀 370석을 하사하여 운현궁을 수리하고 밀렸던 빚을 갚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1991년 대원군의 5대손 이청(1936~)씨가 서울특별시에 양도 의사를 밝힘에 따라 서울특별시에서 매입하였고 1993년 11월부터 운현궁에 대한 보수 및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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