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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사는 병영에서 일어났던 기미년의 삼일운동에서 순국한 독립투사와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가 돌아가신 기미계원(己未契員)들을 봉안한 사당이다. 기미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지방에도 파급되어 울산의 병영에서도 서울에 유학하고 있던 한명조(韓命祚), 이영호(李永浩)로부터 이를 전해 듣자 때를 놓치지 않고 청년회 간부였던 양석룡(揚錫龍), 이현우(李鉉雨), 이종욱(李鍾旭), 이문조(李文祚), 박영하(朴永夏), 김장수(金長壽), 이종근(李鍾根) 등은 거사를 위한 모의를 거듭한 끝에 4월 5일과 6일의 양일에 걸쳐 성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 일신학교(日新學校) 학생과 성내의 온 주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때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수비대와 충돌하여 그 자리에서 엄준(嚴俊), 문성초(文聖超), 주사문(周士文), 김응룡(金應龍)의 네 사람이 순사하고 송근찬(宋根讚), 김규식(金圭植), 김두갑(金斗甲) 등 많은 사람들이 중경상을 입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해산하고 말았다. 실형을 받았던 동지들이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들은 기미계(己未契)를 만들어 순국한 동지의 외로운 넋을 달래기 위해 매년 비밀리에 빠짐없이 제사를 4월 6일에 받들어 오다가 1955년 영모각(永慕閣)을 개수하여 3·1사(祠)를 세우고 이들을 안치하는 한편 3·1사 봉제회를 만들어 길이 그들의 뜻을 받들어 오고 있다. 3·1사는 1955년에 현 위치에 세웠다가 이를 남외동 549-1번지로 한동안 옮겼으나 다시 이 자리에 사당을 새로 지었다.
더보기이곳은 40대, 3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울산 병영, 병영초등학교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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