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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암 여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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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암 소개

백화암
친절한 다시가고싶은 깨끗한

백화암은 경기도 양주시 양주읍 유양리 불곡산(佛谷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양주의 관아가 있던 유양리 불곡산에 자리한 백화암은 신라시대의 고찰로 도선(道詵)국사에 의해 ‘불곡사(佛谷寺)’로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고, 조선 후기에 와서 백화암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사찰의 대부분이 전소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며, 남아 있는 몇몇의 유물들을 통해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절 입구에는 수령 500년가량 된 느티나무가 서 있으며, 나무 아래에는 1841년(헌종 7)에 세운 양주 목사 서염순(徐念淳)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또한 절 앞마당에 신복사지 삼층석탑을 본 떠 새롭게 만든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끼워져 있는 연화대좌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것으로 보여 절의 창건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백화암은 절 이름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관음기도 도량이다. 이를 대변하듯 절에서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큰 암벽을 깎아 조성해 놓은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최근에 조성한 이 마애불은 아미타여래좌상, 관음보살입상, 대세지보살입상으로 이루어진 아미타삼존불로 유난히도 흰 석질을 띠고 있다. 한편 절 바로 아래에 있는 솟아나는 약수는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고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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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암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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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암 특징

이곳은 50대, 3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도선국사, 불곡산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 연령 분포도

hook

백화암 여행 관련어

삼불암 유양동 서산대사 불곡산 표훈사 감탄하다 양주시청 도선국사 불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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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장군묘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장인 권율(權慄, 1537∼1599)과 정부인 창녕 조씨, 후부인 죽산 박씨의 묘이다. 권율은 안동 권씨로 선조 15년(158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목사로 근무하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한양 수복을 위하여 북상하였으나 용인싸움에서 패하자 다시 광주로 되돌아가서 군사를 모아 충청도 금산 이치싸움에서 왜적을 대파시켜 전라도 지역을 지켰다. 이어 함락된 한양의 수복을 위하여 다시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산성에 진지를 구축하고 왜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후 행주산성으로 진지를 옮겨 권율이 일사분란하게 통솔하고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워 대승을 거둔다. 권율은 이 공으로 전군을 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으며,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선조 32년(1599) 관직을 물러나 그해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일반적인 묘역구조는 봉분(封墳)앞에 묘비(墓碑)·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있고 상석(床石)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양쪽으로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을 각각 1쌍씩 세웠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남쪽 가까이 세웠다. 권율의 묘역은 이러한 원칙에 비교적 충실히 하였다. 권율의 묘소에는 묘비(墓碑)·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각1기씩 있다. 그리고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표시인 망주석(望柱石)과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세우는 동자석·문인석(文人石)이 각 1쌍씩 세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기존의 신도비가 비문이닳아 없어져 철종 12(1861)에 권율의 후손들이 새로 건립한 것이다. 1971년과 1999년 정화사업으로 묘를새롭게 단장했다.* 시대 - 조선 선조 32년(1599)
즐거운 활기찬 낭만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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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곡산

불국산으로도 불리는 불곡산은 해발 470m로 그리 높지 않지만 '대동여지도'에 양주의 진산으로 나와 있다. 양주시 유양동 및 산북동의 경계에 솟아있으며 서울 근교의 다른 산과 달리 주말에도 붐비지 않아서 좋다. 산의 규모는 작으나 기암들로 이어진 오밀조밀한 산세를 자랑한다. 인근의 도봉산에 밀려 빛을 못보고 있으나 교통이 편리한데다, 봄철이면 진달래가 만발하는 산이다. 특히 유양동에는 옛 양주군 관아지를 비롯해 문화 유적들도 산재, 자녀교육을 겸한 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다. 또한 산 중턱에는 신라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백화암이 있다. 백화암 밑에 있는 약수터는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고 혹한에도 얼지 않는다고 전한다. 백화암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험한 편이다. 정상의 암벽 지대는 겨울철 눈이 내리면 위험한 코스다.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양주시와 의정부시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유양리에는 양주목사가 4백여년간 행정을 펴던 동헌과 어사대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양주향교(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국가 무형문화재 제2호) 전수회관, 양주목사가 휴식을 취하던 금화정, 양주산성 (경기도 기념물 제143호) 등 문화재가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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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묘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고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들어서야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족보를 확인하는 어려운 작업 끝에 간신히 찾은 황사영의 묘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위치해 있지만 아직 변변하게 사적지로 개발되지 못하고 거의 방치돼 있는 상황이다.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名門) 출신이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이를 계기로 결국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그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 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때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 문서를 품고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 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몰락하고 그 여파로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 귀중한 교회 사적 자료인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고, 모두 1백 22행, 1만 3천 3백 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서 첫째는 신유박해 중에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간의 골육 상잔의 치열한 당쟁이었음을 피력한 다음 세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되어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시 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 시대: 1775년~1801년(영조 51년~순조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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