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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명장인 권율(權慄, 1537∼1599)과 정부인 창녕 조씨, 후부인 죽산 박씨의 묘이다. 권율은 안동 권씨로 선조 15년(158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목사로 근무하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한양 수복을 위하여 북상하였으나 용인싸움에서 패하자 다시 광주로 되돌아가서 군사를 모아 충청도 금산 이치싸움에서 왜적을 대파시켜 전라도 지역을 지켰다. 이어 함락된 한양의 수복을 위하여 다시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산성에 진지를 구축하고 왜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후 행주산성으로 진지를 옮겨 권율이 일사분란하게 통솔하고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워 대승을 거둔다. 권율은 이 공으로 전군을 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으며,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선조 32년(1599) 관직을 물러나 그해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일반적인 묘역구조는 봉분(封墳)앞에 묘비(墓碑)·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있고 상석(床石)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양쪽으로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을 각각 1쌍씩 세웠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남쪽 가까이 세웠다. 권율의 묘역은 이러한 원칙에 비교적 충실히 하였다. 권율의 묘소에는 묘비(墓碑)·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각1기씩 있다. 그리고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표시인 망주석(望柱石)과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세우는 동자석·문인석(文人石)이 각 1쌍씩 세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기존의 신도비가 비문이닳아 없어져 철종 12(1861)에 권율의 후손들이 새로 건립한 것이다. 1971년과 1999년 정화사업으로 묘를새롭게 단장했다.* 시대 - 조선 선조 32년(1599)
더보기이곳은 30대, 40대 방문이 많고 방문객들은 주로 양주 고기집, 양주 카페에 관해 관심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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